어릴 적 저는 뉴욕에서 자랐습니다. 그곳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가진 이들이 모여 살아가는 도시였습니다. 거리만 조금 걸어도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와 음식, 풍습을 만날 수 있었지요. 자연스럽게 저는 다양한 문화 속에서 자라며, 신앙과 문화가 충돌하는 순간들을 종종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고린도전서를 주제로 성경공부를 인도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주제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고린도는 당시에 다양한 신전과 제사가 있었고, 음식 문화도 그것과 깊이 얽혀 있었지요. 성도들이 이런 상황 속에서 신앙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혼란스러워 했던 것입니다.

공부 도중, 한 자매님께서 조심스럽게 질문하셨습니다. “제 남자친구가 ‘할랄 가이즈’ 음식을 좋아하는데, 그 음식이 알라에게 바쳐졌다는 말을 들었어요. 저는 기독교인인데, 그런 음식을 먹어도 괜찮을까요?”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2천 년 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질문과 지금 자매님의 질문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을요. 시대는 달라도, 사람들의 고민은 여전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묻고 있습니다. “이 문화 속에서, 이 선택이 내 믿음에 어떤 영향을 줄까?”

그래서 저는 조심스레 말씀드렸습니다. “그 음식이 단순한 요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면, 신앙인으로서 조심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을 ‘옛날 이야기’라 여기며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 유혹, 신앙의 갈등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언급하며 경고합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지만, 결국 우상 숭배와 불순종으로 멸망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거울과도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 역시 성적인 타락, 분열, 교만, 끊이지 않는 불평 속에 있었습니다. 성령의 은사마저 자랑거리로 전락했지요. 바울은 그들을 향해 간절히 외칩니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말합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잖아요.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아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다르죠.”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알고,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고린도 교회와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교회도 여전히 갈등과 상처, 비판과 불만 속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마치 광야에서 길을 잃은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때때로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는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넘어진다 해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일어설 길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며, 결국 승리하게 하십니다.

성경은 교회의 문제를 숨기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속 초대교회도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갈등과 실망, 분열과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통해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미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부활 주일,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기억하며, 일어나 빛을 발하시길 소망합니다. 은혜가 흘러갈 수 있도록 한 걸음 한 걸음 끝까지 달려 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