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6장에서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그리고 로마의 권위자들 앞에서 자신의 변호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과거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젊은 시절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했던 장본인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밝은 빛과 함께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만남 이후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을 변명하거나 해명하는 데 급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만난 예수님에 대해 담대하게 증언했습니다. 이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지만, 그것이 잘못된 일임을 깨달았고, 이제는 예수님이 진정으로 살아계신 분임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이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정직하고 의롭게 살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모습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에 대해 담대하게 증언하자, 베스도 총독은 당황했습니다. 그는 바울이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바울이 이 기회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시간으로 사용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말을 막으려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을 다니며 예수님을 전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항상 환영받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거부당하고 박해받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세례 요한 역시 헤롯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전하며 수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동일한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고난이 너무나 억울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잘못된 것일까요?"라고 묻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진실하게 전할 때, 세상의 반대와 저항에 부딪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에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끝났다면, 우리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에서 끝나지 않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부활 이전에는 반드시 고난과 죽음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이 고난을 먼저 겪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부활의 진리가 참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며 그의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거리낌 없이 증언할 수 있었던 이유로, 아그립바 왕이 이미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들은 은밀한 곳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예루살렘을 여러 차례 방문하며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셨기에,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바울은 주장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바울이 '예수에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께 자신의 생명을 드린 삶을 살았다는 의미에서 바울은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 맞습니다. 그것은 욕이 아니라 칭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슬쩍 숨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예수님께 푹 빠진 삶으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더욱 성화된 삶으로 나아가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