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잔멸시킨 장본인입니다.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님 중 한 분인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을 주도한 사람입니다. 그런 젊은 청년의 사울이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길에 예수 그리스도를 환상 가운데 만나게 됩니다. 구원을 경험합니다.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 이후, 사도 바울이 변한 삶을 사도행전을 묵상해 보며 배웠습니다. 목숨까지 내건 그런 선교 사역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데로 내가 계획한 대로 살아간 삶의 모습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 이끌리어 순종하는 삶을 사도 바울은 살아갔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품으려고 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핍박과 환난으로 이어졌음에도 말입니다.
그런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어 이제는 이방에 세워진 교회들이 모교가 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모금을 하여 많은 이들이 모였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의사 누가, 루스드라 출신으로 바울의 제자이자 영적 아들인 디모데, 그리고 마게도냐, 아가야, 갈라디아, 아시아 각 지역 교회의 대표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이사랴를 떠날 때는, 원래 일행에 더하여서 “가이사랴의 몇 제자”도 같이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사실은 가는 곳곳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고난과 환난을 겪을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아가보 선지자는 성령이 말씀하심을 듣고 사도 바울의 띠를 자기 손에 묶고 발에 묶으며 예루살렘에 가면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이방인들에게 잡혀갈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 길에 나선 많은 이들이 눈물 흘리며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가 받는 고난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강권하였습니다.
앞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님들께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사도 바울의 일행은 배려 속에 놓치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향한 단호한 결의입니다. 3년 동안 에베소에서 말씀 묵상하며 양육 받은 제자들도 각양 각처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사도 바울이 겪게 될 고난에 대해 알게 된 이들도 사도 바울이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에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행 21:13) 사도 바울이 그들의 권함을 받지 아니할 때 마침내 그들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단 한 사람만이 사도 바울의 결의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합니다. 나손이라는 사람입니다. 구브로 사람 나손은 “오랜 제자”였습니다. 나손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일행에 합류한 이유는 그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손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그 길이 예수님께서 앞서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임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을 향한 결의를 이해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그 험난한 길을 위해 온전히 보살펴주고 함께하길 소망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는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바울과 그를 잘 보필하는 나손과 같은 사람을 통해 일어납니다. 성령에 감동을 받은 제자들도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지 않도록 권하였지만, 나손만이 유일하게 사도 바울이 가야만 하는 길을 함께 보았고 동행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확실히 체험하고 싶으시다면 나손 처럼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시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함께 체험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