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들이 돌아가시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자녀들이 부모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나 집 사람은 네 분의 부모님들과 이 땅에서는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늘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 앞선 세 분의 임종은 한 번도 지켜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장인 어른은 간암 투병을 하셨습니다. 30년 전 저희 가족이 미국으로 유학을 온 그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집 사람은 둘째 아이 쟈슈아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9월이 막달이었습니다. 오늘 내일 하는 중에 장인 어른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장모님은 장인 어른이 돌아가신 사실 자체를 알리시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저에게만 따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집사람에게는 아이를 다 출산하고 난 후 알리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결국은 돌아가신지 4개월이 지난 후 한국에 들어가서 장지에만 가 볼 수 있었습니다. 장모님은 5년 전에 천국에 가셨습니다. 몸은 약하기는 하셨어도 큰 지병이 없어서 오래 사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저와 집사람이 터어키, 그리스 성지순례를 인도하는 중에 연락을 받고는 급하게 한국으로 들어갔습니다. 처남도 호주 인근 섬나라에서 비지니스를 하는 관계로 자녀 중에는 아무도 장모님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2년 전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는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를 때였습니다. 더욱이 오미크론 변종이 퍼지면서 각나라마다 방역이 더 심해졌습니다. 어머님이 그 기간 중에 코로나에 감염이 되셨습니다. 한국에서는 코로나에 감염이 된 사람을 감압실이라는 병동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입원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만날 수 없습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도 유리창 너머로만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간호사가 전해주는 쪽지로 가끔 소통을 하는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병세가 호전되는 것 같았는데 곧 위독한 상황으로 갔습니다. 그때는 급하게 한국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사망진단서가 없이는 입국 자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곧 운명하실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진단의견서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머니의 사망을 기다리는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결국 어머니와는 한 마디의 통화도 못해보고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사망진단서를 이메일로 받아서 영사관에 제출하고 입국 허가를 받은 후에야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도 곧바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장례가 오전 10시였습니다. 새벽 5시에 도착을 했기에 급한대로 장례식은 참여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공항에서 코로나 검사를 하고 그 결과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아무리 사정을 이야기해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무려 8시간을 공항에서 기다린 후에야 장례식장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례식은 이미 끝났고 납골당에 어머니 모신 후였습니다. 장례식장으로 갈 필요도 없이 납골당으로 바로 가서 그곳에서 어머님을 뵈었습니다. 너무 아쉽고 얼마나 허탈했는지 모릅니다.

이번에 마지막 남으신 아버님은 꼭 임종전에 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그런데 마침 김성문 집사님이 소천하셨습니다. 임종예배를 드리고 장례일정이 28일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아버님이 좀 더 기다려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이곳에서 장례식이 끝난 후 바로 한국으로 들어가기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님 상태가 그렇게 오래 기다리시지 못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한 시간 한 시간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습니다. 그때 목협회에서 한국에 빨리 들어가라는 권면을 해주셨습니다. 조광윤 집사님도 흔쾌히 양해를 해주셔서 한국에 5일 월요일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날 바로 중환사실에 계시는 아버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말씀은 잘 못하셔도 눈을 뜨시고 저와 집사람을 알아보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동생 송병국 집사를 찾으셨습니다. 곧 들어온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결국 수요일에 송병국 집사도 들어와서 아버님을 뵈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버님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졌습니다. 결국 금요일 아침 막내 아들 품에서 이 땅에서의 모든 여정을 마치셨습니다. 운명하신 후 곧바로 임종예배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과 임종을 함께 한다는 것은 마지막 가장 큰 축복임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