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가가 알렉산더 대왕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왕궁에 들어가 왕의 얼굴을 보고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왕의 이마에 흉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그리자니 왕의 존엄성에 누를 끼칠 것 같았고, 없는 것처럼 그리자니 진실을 외면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화가는 무릎을 치면서 , 이렇게 그림을 그리면 되겠군!”하며 좋아했습니다. 왕이 산책을 할 때 흉터 있는 자리를 손으로 가린 모습을 초상화로 그렸습니다. 왕의 이마에 난 흉터를 자연스럽게 가리면서도 진실성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 아주 휼륭한 그림이었습니다.

물론 왕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화를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허물을 덮어준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허물은 꼭꼭 덮으려고 합니다. 누가 내 허물을 드러내는 것은 참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남의 허물은 잘 덮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가 허물을 이야기할 때 맞장구를 칠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에게 허물이 있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 상대방이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운전을 하다가 과속을 해서 경찰에게 걸리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분명히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걸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경고만 해주고 스티커는 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입니다. 스티커를 떼더라도 벌금이 적은 것으로 해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켈리포니아에서 과속에 걸린 적이 있습니다. 스피드건에 나온 것보다 몇 마일을 줄여주는데 그것도 얼마나 감사한 지 몰랐습니다. 켈리포니아는 트래픽 스쿨에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벌점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트래픽 스쿨에 가게 됩니다. 그래야 자동차 보험도 많이 오르지를 않게 됩니다. 하루 종일 8시간 교육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강사가 5시간이 끝나고는 가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습니다. 약속에 늦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차를 몰다가 그만 앞차를 추돌했습니다. 겁부터 납니다. 사람은 다치지 않았는지, 차는 데미지가 많이 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많이 됩니다. 그런데 나에게 받힌 앞차에서 나온 운전자가 자기 차를 돌아보더니 괜찮다는 것입니다. 살짝 찌그러지기는 했는데 차가 오래 되어서 타는 데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걱정하지 말고 잘 가라고 웃으면서 인사를 합니다. 얼마나고맙고 감사한 지 모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게 은혜로 나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해지는지 모릅니다. 감사가 넘쳐나고 하루종일 기분이 좋습니다. 10여년 전 쯤인것 같습니다. 저도 그때 연식이 제법 오래된 차를 몰고 있었습니다. 교회로 오는 도중 신호등에 서 있는데 뒷차가 저를 추돌했습니다. 아마 한 눈을 팔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운전자는 아주 미안하고 속상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습니다. 저도 내려서 차 상태를 보았습니다. 물론 조금 찌그러지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크게 수리를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저도 과거에 은혜를 받았던 적이 있기에 그 사람에게 똑같이 해주었습니다. 차가 오래되어서 고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냥 가시라고 했더니 얼굴이 확 펴지면서 너무 고마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못했을 때 상대방에게 은혜를 기대합니다. 그 은혜를 받으면 너무 좋아합니다. 그 사람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한가득 남아있게 됩니다. 마음이 포근해집니다. 각박한 세상에 온기가 도는 것 같습니다. 이웃이 내게 은혜로 대하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먼저 은혜로 대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말씀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7:12).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구약만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한 것이지 사실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말씀이 그 한 구절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활금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웃이 우리를 은혜로 대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이웃을 은혜로 대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올바른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